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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것 말고 다른데 눈을 돌리면 혼쭐이 납니다.” 해인사에서 원주(院主)와 도감(都監) 소임만을 보며 살았던 영월(迎月)스님은 제자들이 공부 외에 다른데 신경을 쓰기라도 하면 야단을 쳤다고 한다.영월스님의 둘째 상좌인 등각(직지사 은선암 암주)스님은 “우리 은사스님 스스로도 공부하고 대중 외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소임을 맡지 않으셨다.”면서 “해인사에 사실 때에도 원주나 도감 소임 밖에 보시지 않았다.”고 밝혔다.
원주나 도감 소임은 절집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일로 누구도 선뜻 맡으려 하지 않는 게 상례이다.
영월스님은 대중들이 정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원주와 도감 소임을 보았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해인사 영월스님 하면 ‘영원한 원주, 영원한 도감’이라는 별칭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영월스님은 남에게 상(相)을 내는 것은 한사코 마다했다.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한차례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대중들이 모이는 곳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다. 혹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법문을 청해오면 “대중 앞에서 설법할 일이 없네.”하면서 간곡히 사양했다. 그렇지만 영월스님은 여법하게 사는 당신의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때문에 해인사에서는 영월스님을 두고 “사시는 모습 자체가 귀감이고 후학들에게는 경책이다.”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모습 드러내는 것을 마다했던 영월스님은 심지어 해인사의 모든 대중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진촬영’을 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영월스님이 찍은 유일한 사진은 1984년 상좌들이 제주도로 만행을 모시고 갈 때 대구를 들러 시내 명성사진관에서 ‘억지로’ 촬영한 것이다.

평소 고함소리를 내지 않고 자상한 풍모를 지녔던 영월스님은 앞서 말한 대로 상좌들이 모양새에 신경을 쓰거나 다른 일에 관심을 보이면 혼을 냈다.
등각스님의 말이다. “우리 스님은 상좌들이 승복(僧服)을 폼 있게 다려 입기라도 하면 야단을 하셨습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옷에 신경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먹는 일도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음식은 목구녕 넘어가면 되지 하면서 밥 먹을 때 먹으면 그만이지 간식은 웬 말이냐’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어느 절에 갔을 때 남루한 영월스님의 승복을 다른 스님이 손질하자, 이를 본 영월스님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옷 잘 입으려고 출가 한 것이 아니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가사와 장삼을 입지 못할 정도로 훼손이 돼야 당신이 직접 바느질을 했으며, 신도들이 승복을 새로 해오면 입지 않고 다른 스님들에게 건네주었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시주금이 들어오면 따로 모아놓는 게 아니라 쌀뒤주 위에 그대로 올려 놓았다. “돈은 있는 대로 되돌려 써야지, 모아 놓는 것은 아니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절에 들어온 돈은 대중이 공유하는 시물(施物)이라는 뜻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정미년(丁未年)인 1907년 음력 4월8일 부처님 오신 날에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영월스님은 19세 되던 해에 전주 위봉사에서 보문(普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세속에서의 이름은 정창기(丁昌基)이다. 영월은 법호이고, 법명은 상기(常基)이다.
은사 보문스님을 모시고 해인사로 온 이후 줄곧 가야산에 지켰다. 한때 전주 은석사에서 500일 동안 지장기도를 했으며, 지리산 벽송사에도 머문 적이 있다.

키는 175cm에 이르는 장신이었으며, 기골이 장대했던 영월스님은 특히 남의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손주상좌인 정일스님의 말이다. “노스님은 평생 남에게 시은(施恩)을 받지 않고 살려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드신 후에도 빨래를 손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의 방을 데울 나무도 직접 해 오셨습니다. 작은 도끼와 톱을 들고 해인사 뒷산에 올라 나무를 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