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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선사 행장 4


영월선사는 

1907년 정미년 음, 4월 8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논산리 224번지에서 부친 丁京三 님과 모친 金姓女 사이에 막동으로 출생 하시다, 본명은 丁還甲 이며 본관은 靈城 이시다.

1926년 19세 시에 전주 威鳳寺로 발심 출가하시다. (당시 위봉사는 현 금산사의 본사임)

1930년 4월15일 23세 시에 전주 鳳棲寺에서 普門禪師를 은사로 월운계사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하시고 法名을 尙基라 하시었다.

1932년 恩師이신 普門선사를 따라 해인사에 入房하여 經學을 배우시다.

1937년 海印寺에서 보탁스님을 계사로 具足戒를 수지 하시다.

1938년 해인사에서 보탁스님을 계사로 菩薩戒를 수지 하시고 법호를 迎月이라 하시다.

1938년부터 49년간 海印寺를 일생 수행 근본도량으로 정진하시면서, 간혹 수도산 수도암 선원, 속리산 복천선원, 지리산 벽송선원, 팔공산 성전선원등 전국 소 선원에서도 정진하시었다. 특이한 것은 해인사 원림대중 처소에서 항상 낮은 후원 소임인 원주 도감 소임만을 도맡아 하시고, 그 이상의 소임을 맡거나, 대중공사에 나서거나, 법상에 오르거나, 그 많은 결제 해제 때 대중 사진 한번 찍은 일 없이 일체 상을 낸 일이 없이 보살의 수행으로 일관하시다.

1950년 한국동란을 맞아 최후까지 해인사를 지키시었고, 그 후부터 희랑대와 지족암에서 수행하시다, 만년에 지족암에 계실 때 손수 땔감을 마련하시려다 다리를 다쳐 극락전으로 거처를 옮겨 노후 정진하시다.

1987년 음 7월 21일 새벽2시 세수 80세 법납 61세를 1기로 열반에 드시니. 스님은 부처님과 같은 날 나시고 같은 나이에(舊典에 세존은 19세출가 12년간 고행성도 49년 설법 80세 열반으로 되어있음) 출가하시어 12년간 경학을 배우시고 49년간 수행자의 삶을 보이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 스님은 前世로부터 부처님 행장을 닮은 수행자가 되시려는 자기 誓願이 堅固하셨는지? 아니면 相으로 가득한 末世에 부처님이 化現하시어 우리에게 菩薩의 삶을 다시 보이심인지? 의심케 하는 수승한 삶을 사시다.

1987년 7월 23일 해인사 九光樓 앞에서 일타스님이 기록한 臨終偈를 걸어놓고 山中葬으로 永訣式을 올리고 해인사 蓮花臺에서 법답게 茶毗하니 맑은 연기가 가야산을 덮으며 온 산림이 그대로 법신 사리가 되시다.   

1987년 음, 9월 8일 성주 관운사에서 49재를 올린 후에 영월선사의 문하가  모두 모여 선사를 정점으로 하는 문도회를 결성하였으며 그 문장에는 고봉스님이 되시고 8명의 문도 중심을 선임하여, 매년 음, 7월 21일 제사 후 문도회일로 정하고, 영월선사의 수행 정신(참선수행, 하심수행, 무소유정신,)  을 되새겨 문도는 서로 탁마 장양하기로 하였다. 

당시 상좌는; 고봉, 등각, 금해.

당시 손상좌; 지산, 일화, 정일, 청파, 불암, 초암, 법산, 남강, 대안, 상락, 진오, 성종, 성호, 성보, 설봉,

당시 증손상좌; 효담, 효신, 효덕


2007년 음, 7월 21일 문도회에서 영월선사 제사를 관운사 한곳에서20년 이상 봉행 하였으니 차후로는 徒弟 寺刹에 巡廻제사를 지내다가 탑전 다례로 올리기로 협의 하였다.


2009년 음, 2월 21일 지리산 청계사에 영월선사의 부도탑을 세우고 처음 다례제를 올렸다,


영월 선사의 恩脈에 관하여는 고봉스님께서 찾으려 노력하시다가 다 밝히지 못하고 입적하시었다,

선사의 恩師는 참선 잘하기로 소문난 普門스님이나 그 行狀은 자세하지않다,

보문스님의 내력을 고암스님의 증언으로는 보문스님과 용성스님이 사촌 사형 사제 관계라는 것이다. 보문선사의 윗대 일을 모두 듣고도 後代들의 관심부족으로 記憶하지도 않고 記錄하지도 않아 뿌리가 혼몽한 상태니 애석한 일이다. 이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고자 영월 선사의 行狀을 간추려 두고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젊은 우리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셨고 궂은일을 마다하시지 않았던 노스님은 그 어느 곳보다 가야산에 머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겨울 군불 땔감을 마련하시다 다리를 다쳐 지팡이에 노구를 의지하여 오시던 도중에도 젊은 스님들이 곁을 지나칠 때마다 당신의 걸음질은 쉬며 찬찬히 웃어주시던 노스님이셨는데, 이제는 가야산 구름이 되셨습니다. 영월 노스님, 당신의 불편한 몸을 지탱케 한 그 지팡이와 가을 하늘의 구름만 한가롭습니다.”

 

1987년 9월13일 오전 2시 해인사 극락전에서 열반에 든 영월스님을 추도한 이글은 해인지 ‘해인소식’난에 실린 내용이다. 젊은 학인스님들이 느꼈던 영월스님의 모습을 숨김없이 알 수 있어 소개한다.

 

영월스님의 입적 당시 법납은 60세이고, 세수는 80세였다. 스님이 남긴 유품은 열반 당시 입고 있던 가사와 장삼을 제외하고는 산나물을 캐고 잔가지를 담아오던 ‘망태’가 전부였다. 해인사 다비장에서 다비를 한 후에 남은 유해조차 거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해인사에서 ‘초상’이 나서 다비한 어른 가운데 가장 깨끗하게 화장(火葬)된 분”이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입적후 유품 가사 장삼에 망태뿐

“부도 만들거나 사리 수습 말라”

 

스님의 승적에는 법호가 영월당(映月堂)으로 법명은 상기(尙基), 세속에서의 이름은 정환갑(丁還甲)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년월일은 1907년 4월8일로 주민등록증의 앞 번호도 이와 같다. 사미계는 1930년 4월15일 운월스님을 계사로 봉서사에서 받았고, 보살계는 1935년 10월15일 보탁스님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받았다. 구족계는 1937년 4월15일 보탁스님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수지했다. 은사는 보문스님이다.

 

영월스님은 해인사 대중뿐 아니라, 다른 절의 스님들에게도 신망이 높았다. 특히 송광사 방장 구산(九山)스님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구산스님은 “영월당이 바깥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참되게 공부한 수행자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암에서 두 분이 같이 방부를 들이고 정진하기도 했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

 

평소 무자 화두를 들고 정진한 영월스님은 참선정진과 울력을 마친 저녁에는 〈육조단경〉을 많이 보았다. 차분히 당신 방에 앉아 화두를 참구하고, 경전을 보던 스님의 모습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었다.

 

영월스님은 남에게 결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혹시 출타를 하더라도 사중(寺中)에 차비 한 푼 요구하지 않았고, 빨래도 손수했다. 더구나 새 옷은 입지 않고, 늘 검소한 풍모를 지녔던 것으로 유명하다. 영월스님을 시봉했던 정일스님은 “남에게 싫은 소리 하시는 적이 결코 없었다”면서 “남을 험담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늘 공부하고 정진하는데만 전념했던 어른”이라고 회고했다.

 

영월스님의 입적 당시 불교신문에 실린 노스님의 열반을 알리는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해인사 지족암에서 30여년 수행에만 전념해온 스님은 그동안 원주 공양주 부목의 소임까지 도맡아 하여 대중에게 귀감이 되어왔다. 6.25 동란 때는 인민군이 절에 들어오자 혼자서 절을 지키는 등 보살행을 실천해 오기도 했다.”

 

스님은 열반에 들면서 “부도를 만들거나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비를 모신 후 가야산에 흩뿌려졌다. 반평생 가까이 해인사에 주석한 영월스님은 열반 후에도 해인사와 함께 한 것이다. 상좌로는 고봉, 등각, 금해(錦海) 스님이 있고, 손주상좌는 다음과 같다. 지산, 일화, 정일, 청파, 불암, 초암, 청호, 법산, 법상, 대안, 범천, 진오, 성종, 성호, 성매, 성보, 설봉 스님.

 

등각스님(직지사 은선암)은 “우리스님은 평범하게 사셨기 때문에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어른”이라면서 “그러나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 누가 있으나 없으나 여법하게 정진하신 분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귀감이 되는 어른”이라고 말했다.